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쌍령 전투 (문단 편집) === 청군의 병력 규모 추정 === [[http://egloos.zum.com/lyuen/v/5417683|쌍령전투 당시 화약 지급량과 전투경과]] 쌍령전투가 벌어진 1월 3일에 해당하는 청태종실록 권33 숭덕2년 1월3일조에 보면 "패륵 岳託이 전라도 심총병과 충청도 이총병의 군대를 격파했다"고 나온다. 1월3일은 우리측 기록에서 쌍령전투가 발발한 날이므로 이 자료의 전라총병은 경상총병의 오류로 보이고 심총병이 바로 경상 감사 심연을 지칭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. 청태종실록 해당 날짜에 청군 병력 규모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만 패륵은 대충 '''6000~7500명 정도의 병력'''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므로 패륵 악탁(요토, 岳託)이 쌍령전투에 지휘한 청군의 병력 규모도 그 정도 수준(수천명)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. 다만 구체적인 병력 수치는 추가적인 사료를 확인해 봐야할 것이다. [[http://egloos.zum.com/lyuen/v/5417683|출처]] 남급본 <병자일기>를 보면 조선군이 쌍령에 도착한 시점부터 청군 척후가 조선군을 둘러 쌌는데 아군이 이를 몰랐다고 되어 있다. (賊之斥候已環於我軍而不知也) 척후가 이미 조선군을 둘러쌀 정도면 척후만도 상당한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. 그리고 쌍령전투에서 묘사된 상황 정도의 대규모 압사 사고를 일으킬 정도라면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착각할 정도의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.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느낄 정도의 병력이라면 적어도 수천 명 이상의 청군이 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. 훗날 허완의 사망 당시 상황을 <[[승정원일기]]>가 묘사하면서 '''청군 수천 기''' 운운하는 기록이 남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. [[http://egloos.zum.com/lyuen/v/5417683|출처]] 당사자인 청측의 기록에서는 『황조문헌통고』에 '(청 태종이) 숭덕 원년(1636년)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'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 그리고 패륵이 지휘하는 병력 수가 최대 6000~7500명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실제 청군의 병력 수는 3000명~7500명 수준으로 추정 할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